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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말 안 듣는 조선인 중 말 안 듣는 조선인

by Estrea 2023. 2. 1.

출처 네이버 포토

박열 줄거리

독립운동가인 박열과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관동에 퍼진 괴소문으로 인해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학살된다. 재난에 따른 내부의 정치,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 희생양으로 삼아 조선인들이 학살됨에 따라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 내각은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인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한 다. 박열은 고등학생 시절 3.1운동에 가담해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가서 허드렛일을 하며 유학을 시작한다. 그리고 흑우회, 흑도회를 조직하며 아나키스트(정부가 필요 없는 사회 지지자)가 된다. 일본인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바람 잘 날 없는 가족사로 인해 조선의 고모 집에서 지내는데 할머니에게 학대를 받다가 3.1운동을 보고 독립의 의미를 깨닫는다. 박열의 '개새끼'를 읽고 박열에게 빠져버린 후미코는 동거를 제의해 둘은 일본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동거를 시작하며 동거 서약을 쓰는데 내용은 '동지로서 동거하고, 운동 활동 중에는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 한쪽이 타락하면 그만둔다.' 둘은 아나키즘 단체 불령사를 조직한다. 그 후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났고 이를 핑계로 아나키스트인 박열, 가네코 후미코도 잡혀 가게 된다. 박열은 일본 내각의 계략을 눈치채고 재판에서 일본을 무릎 꿇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박열과 후미코는 재판에서 조선 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며 재판을 받는다고 고집하였다. 재판에서 결국 사형 선고를 받은 두 사람은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옥중 결혼까지 한다.

관동대지진

위 영화의 배경이 되는 관동대지진에 대해 알아보겠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에 있었던 지진으로 지진 지속시간이 무려 7~8분 진도는 최대 7.3의 대지진이었다. 해당 지진으로 최소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칸토 지방에서 무려 15번 이상 일어났다고 한다. 해당 지진으로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식사를 하기 위한 불을 사용했는데 해당 연도의 집들은 전부 목조 집이었으며, 해당 불씨가 이동되어 건물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화재가 커진 이유는 전날 태풍이 일본에서 빠져나가는 중이었으며,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고 한다. 화염 소용돌이가 발생하여 아토 지역의 화재에서는 단 15분 동안 3만 8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대지진 이후 교통 인프라가 파괴되었지만 전 건물의 모양 그대로 복구를 진행하여 현재까지 도쿄의 교통체증을 심화 시키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를 주었다. 이재민으로 인한 관서와 관동 지방의 인적 교류가 활발 해지면서 요리 문화나 대중문화의 교류가 증가했다. 그리고 건물의 내진설계와 내연에 관심을 갖게 되어 건축분야에서도 발전이 컸다. 위 글을 토대로 관동대학살을 말해 보자면 정부가 패닉에 빠졌고 민중들은 화염에 휩싸이고 화난 군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들의 증오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화마가 휩쓴 이유는 음식을 먹기 위해 불을 피웠던 것이었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괴소문을 신문에 실어 대중의 화살을 일본 내각에서 조선인으로 돌리기 위한 아주 치사한 공작이었다. 죄 없는 조선인들은 민간인 이였다.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자의 자세한 보고에 따르면 6,661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영화 평점

독립운동가의 기개와 기지를 볼 수 있었다. 관동대학살의 끔찍함을 함께 느낄 수 있어 분노를 조절하기 힘들었다. 박열의 배짱과 일본인이지만 독립운동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 박열의 연인으로 또는 동지로 조선과 함께한 가네코 후미코, 외신기자들까지 감사하며 보았다. 한국은 독립을 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이 된 거 같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한국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형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일본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또한 자기의 주장을 자신감 있게 얘기하는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치졸한 공작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다. 일본인의 잔인함을 볼 수 있었다. 죽창으로 찌르고, 화형을 하기도 했고, 밧줄로 굴비 엮듯 묶어 강물에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의 디테일은 박열이라는 인물을 많이 담지 못하고, 사건과 주변 인물도 함께 나와 꽉 눌러 담지 못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인 박열을 한 번 더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사형 이후의 내용은 가네코 후미코는 23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후에는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도중 납북되어 평양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고, 후세 다쓰지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형제들에게 사죄한다." 그리고 박열이 남긴 글도 있다. "저들은 내게 불령, 불경하다고 죽음으로 협박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세상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 몸은 단두대에 한 방울의 이슬로 사라지게 할 수는 있으나 내가 뿌린 씨앗은 후세에 남아 딱딱한 지각을 깨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종국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승리자다 나는 영원한 승리자다." 박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세를 위한 꽃을 피웠다고 단언한다. 박열, 후미코, 후세 다쓰지 세 사람의 관계를 깊이 알고 싶다면 MBC <꼬리의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9화 박열 편을 보는 것도 추천해 주고 싶다.